나의 관심사들/일드, 일영, 일본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

김시우 2013. 12. 15. 13:34

 

 

 

 

 

어렸을 때 상상해보는 우리 자신의 미래.

가수나 우주 비행사는 못 되더라도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버지'는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당연한 일'이 내게만은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다. 누구에게라도 일어나는 '당연한 일',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까지 저절로 찾아오는 '당연한 일'이 나에게만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전혀 힘든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 아니었을 터였다. 남에게는 '당연한 일'이 나에게만은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된다. 세상의 일상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평범한 현상이 나에게는 완전히 '기적'으로 보인다...

가수나 우주 비행사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멀게만 느껴지는 그 기적. 어릴 적의 꿈이 깨어져 좌절하는 일 따위는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그럴싸한 직업으로만 치달은 꿈이란 그리 아름다운 발상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른이 생각하는 꿈. 이루어지는게 당연할 터인 일상 속이 소박한 꿈. 어렸을 때는 평범한 것을 몹시도 싫어했지만, 그저 평범하게 남들처럼 되기를 원하는 어른의 꿈. 예전에는 당연한 일로 알았던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었을 때. 평범함에 좌절해 버렸을 때...

그럴 때에 사람들은 손을 맞대고 기원을 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능력은 아직 무한한 가능성이 남겨져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각각의 능력을 반이라도 활용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시험해 보려고 집밖으로 나가고 세상을 향해 질문하고 헤매고 다닌다. 하지만 그런 방황도 능력이다. 활에서 막 쏘아 올려진 화살처럼 얼마간은 똑바로 날아가기 때문에 나름대로 일정한 성과는 거둘 수 있다. 전체 능력의 1, 2퍼센트만 쥐어짠다 해도 조금쯤은 괜찮은 인물이 될 것이다.

  그런데 화살의 궤도가 호를 그리기 시작할 무렵이면 어디선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이 비어져 나온다. 몸이 여위도록 무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이미 끝장이다. 인간의 능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감정이란 이미 오랜 옛날부터 그 한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감정의 받침접시에는 이미 가능성이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의 잠재능력을 남김 없이 끌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 '행복'이라는 해바리기 밭의 도깨비를 의식하는 그 순간부터 아직 보지 못한 자신의 능력 따위는 한 푼의 가치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스스로를 훈계할 능력이 없는 자가 소유한 질 낮은 자유는 사고와 감정을 마비시키고 그 인간의 몸뚱이를 길가 진흙구덩이로 끌고 들어간다....예전에 자신이 무엇을 목표로 살았는지, 무엇에 눈물을 흘렸는지도 잊어버린 채, 소중했을 터인 그것들은 그 방종한 자유 속에서 헛헛한 웃음과 함께 용해되어 버린다. 진흙탕 속의 자유에는 도덕도, 법률도 이미 자제력을 잃고, 오히려 그것을 범하는 것밖에는 남겨진 자유가 없다.... 결국 새장 안에서 하늘을 날기를 꿈꾸며 지금 이곳의 자유를, 이 한정된 자유를 최대한 살려내는 때가 최상의 자유이고 의미 있는 자유인 것이다. 취직, 결혼, 법률, 도덕. 귀찮고 번거로운 약속들. 금을 그어 갈라놓은 룰. 자유는 그런 범속한 곳에서 찾아냈을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자유의 냄새를 풍풍 풍기는 곳에는 기실 자유 따위는 없다. 자유 비슷한 환상이 있을 뿐이다.

 

 

 

그저 평범한 일상이 성실하게 이어졌을 때 비로소 인간의 에너지는 풍성하게 생성되는 것이리라.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이 그곳에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자리의 분위기가

 

환하게 밝아집니다.

 

당신이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두의 마음이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런 당신이

 

나도 되고 싶습니다.

                                                   -아이다 미츠오

 

 

  엄니가 좋아했던 아이다 미츠오의 시였다. 엄니가 동경하는 인물이었을까. 예순 아홉 살의 엄니가 스스로 되기를 원했던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내게 엄니는 이 시 그대로,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내게 환한 빛을 주고 편안함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엄니는 지금도. 어쩌면 며칠 안에 죽어버릴지 모르는 지금도, 아직 무언가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엄니

... 일은 그럭저럭 풀려 가는데, 아직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엄니에게 보여줄 만한 것도 아직 만들지 못했네. 여전히 엄니가 보면 걱정할 생활을 하고 있어. 엄니에게 말 못할 짓도 많이 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마누라도 없고 돈도 그리 벌지 못했어. 자동차 면허도 날아갔어.

 남에게 이래저래 신세만 지고 때로는 남에게 미움을 사는 일도 있는 모양이야.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되지 못했어. 엄니, 저승에서도 내 걱정을 하겠네.......

  엄니.

  나도 여기서 좀 더 노력해 볼게. 지켜봐 줘. 건강관리에도 신경 쓰고 있어. 요즘에는 내 손으로 요리도 해 먹는다니까....엄니가 죽고나서 한동안은 아무 것도 할 맘이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착실히 노력하고 분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엄니 지금껏 이래저래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엄니가 나를 키워주신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네.

 

 

 

 


 

 

 

기록한 것 말고도

 

더 많은 구절을 옮겨놓고 싶지만...

 

혹시 나중에 책을 한 번 더 읽을 기회가 온다면 그 때 더 옮겨놓자.

 

 

삶의 남루한 부분마저 구석구석 관찰하며 적어놓은 릴리프랭키의 글은 인생을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든다.

 

자식을 사랑하며 한없이 베푸는 엄마의 모습

 

그런 엄마의 희생속에 자라나는 아들의 모습

 

우리나라와 너무 흡사하지만

 

이 글의 행간에서 나오는 느낌은 우리나라와는 참 많이 달랐다.

 

누구의 탓이라고 원망하지도 않고

 

자신의 희생에 댓가를 바라지도 않고

 

팍팍한 아귀다툼이나 끓어오르는 분노가 없었다. 

 

우리네 어머니들의 한의 정서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았고

 

아들이 효도강박관념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도 별로 없어 보인다.

 

어찌보면 너무 자유롭고 행복한 모자관계였다.

 

끈끈한 유대관계 속에서도 엄니는 나름의 행복을 추구하며 사셨고

 

아들에게 결코 신세지려 하지 않았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같은 말은 하지도 않았고 할 이유도 없는 거 같았다.

 

그저 상대방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자신이 줄 수 있는 만큼 주면서.. 또 더 해 줄 수 없어 안타까워하면서..

 

그렇게 모자는, 때때로 아버지까지 서로를 존중하며 살았다는 느낌이 든다.

 

너무 따뜻하고 끈끈하지만.. 또한 너무 쿨한 느낌...

 

이런 느낌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주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싶다.

 

존중하고 배려하기..그리고 남 탓 하지 않기.

 

일본사람의 삶 속에 배여있는 이런 분위기가 부럽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 번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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